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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 톡톡

고려시대의 부치지 않은 편지 - 염경애 묘지명




고려시대의 부치지 않은 편지 - 염경애 묘지명








고려 중기의 문신이자 효자로 이름난 최누백(崔婁伯 : ?~1205)이 죽은 첫 부인 염경애(廉瓊愛 : 1100~1146)를 위해 직접 지은 묘지명이다. 한남 최씨라고 해서 예전에 수원을 한남이라 불렀나보다.


고려사 열전에 효자로 들어가 있는 최루백은 수원 향리의 아들로서 과거를 통해 벼슬에 올랐다. 가난했던 하급 관리 시절, 아내에 대한 고마움이 남겨져 있다. 첫째 아내와 사이에 6남매를 두었다고 전하고 있다.


같이 무덤에 들어가지 못함을 원통해 했지만, 반전이 있으니 바로 재혼해서 3남 2녀를 두번째 부인과 낳아서 잘살았다고 한다.



고려(高麗) 의종 2년(1148)

70.3×33×3cm 16.2kg





廉瓊愛墓誌銘



『皇統六年丙寅正月二十八日戊戌漢南崔婁伯之妻峯城縣君廉氏卒 ... 富貴世熾也』




편지를 쓰는 내용으로 아내와의 추억을 이야기 하고 있다.



아내의 이름은 경애라…평소에 일찍이 내게 말하기를,

"…뒷날 불행히도 내가 천한 목숨을 거두고, 당신은 많은 녹을 받아 모든 일이 잘 되더라도 저를 살림하는 재주가 없었다 하지 마시고 가난을 이겨내던 일은 잊지 말아주세요"라고 하였는데, 말을 마치고는 크게 탄식을 했다.

내가 좋은 벼슬로 자리를 옮기니, 아내가 기뻐하며 말하였다. "우리의 가난도 이제 가시려나 봐요"

내가 (무정하게) 대답했다. "간관은 녹봉이나 받는 자리가 아니요"

(그러자) 아내가 말했다.

"어느 날 당신이 궁궐에서 천자(天子 : 임금)와 옳고 그른 것을 따지게 된다면, 비록 가시나무 비녀를 꽂고 무명치마를 입고 삼태기를 이고 살게 되더라도 달게 여길 거예요" 평범한 부녀자의 말 같지가 않았다.

그 해 9월에 아내는 병이 들었는데 이듬해 정월에 위독해져 세상을 떠나니, 한(恨)이 어떠하였겠는가 …